칼빈에 대한 변증 (칼빈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


[신천지 주장에 대한 반증]


칼빈에 대한 변증 (칼빈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


당시 로마 카톨릭은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 박해를 피해 성도들은 양심의 자유를 찾아 현재의 화란인 북부 네덜란드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40년간의 로마 가톨릭의 세력이었던 스페인과 전쟁 끝에 마침내 기독교 국가를 세웠습니다.


특히 칼빈의 종교개혁의 무대였던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이태리의 교역 중심지로 사보이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초반 프라이브르그와 베른의 도움으로 독립을 하였으며, 1534년 부도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던 로마 카톨릭의 주교를 추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로마 카톨릭과의 어려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기냐에 따라 신앙과 생명을 내 주어야 하는 긴박에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기독교 신자였던 파렐(G. Farel)이 실권을 장악하여 로마 카톨릭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을 했지만, 로마 카톨릭의 위협은 여전했습니다.


당시 칼빈은 그곳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파렐은 칼빈과 같은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칼빈을 찾아 갔지만, 칼빈은 나이도 어리고, 소화불량도 심하고, 종교개혁의 뜻도 없고, 학자가 되고 싶다는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파렐은 '네가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저주 할 것이라고'하면서 심판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나중에 「시편주석」에서 칼빈은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파넬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까지 퍼부어 가면서 나를 권면했다. 나는 파렐의 저주의 음성을 듣고, 넉 다운 당해서 계획했던 여행을 표기했다. 그러나 나는 본성이 수줍고 겁이 많아 어느 특정한 직책 수행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종교개혁의 중심역할을 맞게 된 칼빈은, 로마카톨릭 세력을 물리치고, 겨우 세운 제네바에서 중심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기독교 국가로 의회가 오늘말로 말하면 국회입니다. 그러니까 의회의 결정은 칼빈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구상의 존재하는 전 세계의 국가들은 다양한 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국인은 그 법률에 따라 처신해야 합니다. 그 법을 어긴 범법자에게 제네바 의회가 자국의 법률에 따라 처벌을 한 다양한 방식의 형벌을 모두 칼빈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칼빈이 제네바 법원에서 4년간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동안, 제네바 법원은 58명에게 사형을 언도했으며, 76명이 추방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아버지를 때린 소녀에게는 교수형이 내려졌고, 제네바 법원을 능멸하고, 하나님과 칼빈에게 도전했던 쿠르트는 반역죄와 불경죄가 성립이 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가운데 '폐의 혈액순환 기능'을 발견한 자유사상가이며, 의사였던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세 머리 가진 괴물'이라고 말하고, 성경의 예정론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칼빈과 제네바 의회를 공격하였습니다.


제네바 의회는 그를 국가 질서를 흔드는 반역죄로 간주하여 고발이 되었으며, 제네바 의회는 그에게 화형을 시킬 것을 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감옥에 갇혀 있는 그를 여러 차례 찾아가 제네바 의회를 능멸하는 견해를 철회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마침내 제네바 의회를 통해 화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때도 칼빈은 그를 찾아가 화형은 너무 고통스러우니 교수형을 택하라고 권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도 거절했던 것입니다.


칼빈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제네바 의회가 법률에 따라 죄를 선고하고 처벌한 것을 모두 칼빈에게 돌립니다.



물론 세르베투스 사건도 그러합니다.

당시 제네바의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무식한 논리를 적용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네바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되어 진 국가였습니다. 즉 국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칼빈이 죽였다는 말은 그 만큼 당시의 법과 상황을 모르는데서 오는 무지의 소리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당시 제네바는 로마카톨릭 세력과 첨예한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마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와 같았습니다. 만약 로마 카톨릭의 세력이 승리를 하면 수많은 생명이 걸린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단순하게 제네바 의회와 칼빈의 견해를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이런 논리는 법원에서 범법자에게 사형을 언도했다고 하여, 그 책임을 모두 대법원장에게 돌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제네바 의회는 칼빈이 좌지우지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중세시대의 제네바 의회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입니다.



당시에는 세상의 권력 위에 교회가 있었으며, 교회의 정치가 오늘날의 국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제네바 법원이 공정한 판결에 따라 선고한 것을 모두 칼빈에게 돌리는 것은 한 마디로 무지입니다. 심지어 제네바 의회는 칼빈도 쫓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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