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 ‘천지’라고 일컫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1984년 이만희에 의해 창시된 종교단체다. 본거지는 경기도 과천에 있으며,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 즉 신천지가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믿는다.

이만희는 1931년 경북 청도서 태어나 27세 때 한센병(나병) 치료목적으로 박태선이 만든 전도관(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에 입교했다. 이만희는 이곳에서 박태선의 교리를 터득한 후 유재열의 장막성전, 구인회의 천국복음전도회 등을 거친 끝에 신천지를 만들었다. 이 때문인지 신천지는 이들과 유사성이 상당히 짙다.

박태선은 통일교의 문선명과 함께 신비주의 교파인 김백문에게 성경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사망한 박태선은 1955년 전도관을 설립해 김백문에게 전수받은 독특한 교리와 ‘신유(神癒, 병고침)’ 등의 기사 이적으로 신도들을 모았다. 1980년에는 교리를 수정하며 교명을 천부교로 개칭했다. 신도들은 ‘신앙촌’이라고 명명한 거주지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양말, 화장품, 식품 등의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태선은 1960~70년대를 전후해 신유를 명목으로 한 안찰기도와 강제로 신앙촌에서 제조한 ‘생수(생명물)’, ‘시온캬라멜’을 먹이다 신도들이 사망하는 사건, 일명 ‘피가름(영체합일)’ 교리에 따른 혼음, 사기, 위증, 상해 등의 혐의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만희는 1957년 이곳 신앙촌에 들어가 10년 동안 생활하며 자칭 하나님이라 일컫는 박태선을 추종했다. 그러다 1967년 경기도 과천의 ‘장막성전’에 입교했다. 유재열 역시 전도관 출신으로 1966년 장막성전을 설립하여 1969년 종말을 외치다 불발되기도 했다. 1975년 4월 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과천 소재 청계산에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켜 신도들의 노역으로 교회와 호화주택을 지었으며, 여신도들과의 문란한 행위 등으로 일부 신도들에 의해 경찰에 고발되기도 했다. 결국 유재열은 같은 해 9월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이후 이만희는 통일교 강사 출신 목영득에 이어 백만봉을 추종했다. 백만봉은 장막성전에서 유재열을 추종하다 이탈하여 재창조교회를 설립했는데, 1980년 3월 13일을 종말의 날이라고 주장하며 100여 명의 신도들과 함께 물의를 일으켰던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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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봉이 주장했던 종말의 날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이만희는 백만봉과 싸움을 벌이고 이탈한 사람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모여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1980년 9월 유재열을 비난하다가 명예 훼손죄로 구속되었다. 이듬해인 1981년 2월 출소 후 소수의 추종자들과 모임을 시작했는데, 모세와 엘리야 격인 일명 ‘두 증인’이 신광일과 이만희라고 주장했다. 이후 신종환과 이만희를 두 증인이라고 주장했다가 번복하여 홍종효와 이만희를 두 증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만희는 홍종효와도 결별한 후, 자신을 모세로 승격화했다. 그러다 다시 사도 요한적 사명자라고 했다가 점차 보혜사 성령으로 신분을 격상시켰다. 1984년에는 추종자들을 7영, 12사도, 24장로로 임명하고 신천지를 시작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만희는 천부교의 박태선을 시작으로 장막성전의 유재열, 천국복음전도회의 구인회, 통일교 출신 목영득, 재창조교회의 백만봉 등으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피가름(영체합일)’ 교리를 변형한 ‘신인합일체’교리뿐 아니라 경기도 과천에 본거지를 둔 점, 교명에 ‘장막성전’을 유용한 점, 12지파 형태의 조직 등도 맥락을 같이한다. 현재 신천지 신도들은 비상식적인 수법을 동원해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이른바 추수꾼 전략, 산 옮기기 전략이 그것인데, 추수꾼 전략은 타 교회(추수밭)에 위장으로 등록한 뒤 신도들을 꾀어내는 수법이며, 산 옮기기 전략은 역시 타 교회에 위장으로 등록한 뒤 목사를 유혹하여 교회를 통째로 장악하는 수법을 일컫는다.

신도는 약 1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